에릭 로메르의 <삼중 스파이>는 그의 전작 <영국부인과 공작>처럼 역사의 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서 동시에 표면적으론 이데올로기에 희생되는 한 여자의 비극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936년, 인민전선이 정권을 잡고 있던 파리에는 스탈린주의, 프랑스 공산당, 러시아 황제파, 나찌 정권과 같은 유럽을 어수선하게 하는 모든 정치적 이념들이 이웃처럼 공존하고, 망명한 제정러시아 군대 장교 출신인 피오도르와 아마추어 화가인 그의 그리스 부인 아르시노에가 집에서 나누는 대화를 중심으로 피오도르의 정치적 정체성과 관련된 담론의 게임이 시작된다. 러시아 황제파의 외교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듯 보이는 피오도르의 행각은 처음부터 그가 이중, 삼중의 스파이일 가능성을 분명하게 제시하지만, 영화는 피오도르가 아르시노에를 어떻게 완벽하게 속일 수 있는지 또한 아르시노에는 과연 남편의 거짓을 깨닫게 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프랑스 공산주의자인 그들의 이웃과의 친분, 아르시노에의 그림 속에 나타나는 동일하면서 다른 인물들, 레스토랑에서 벌이는 정치적 언쟁처럼 이야기는 한 시퀀스로 닫히는 실내에서 진행된다. 당시의 정치적 사건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필름의 삽입은 이 간소한 공간의 이동만으로 전개되는 심리적 게임을 역사적 사건들의 현장 속으로 확장 시키는 장치이다. 히치콕의 스파이영화가 가지는 두뇌게임의 치밀함을 연상하게 되지만, 이 영화는 시퀀스 내부에서 진행되는 단어의 지시들만을 통해 심리적 서스펜스를 형성해나간다. 로메르 자신은 이 영화가 아르시노에의 관점에서 찍혀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피오도르가 모든 정치적 신념들을 자극하고 조롱하면서 삼중의 의혹을 영화에 부여하는 매개체처럼 움직이면서 숨긴 진실 속에 영화의 진정한 비밀이 숨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