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가 집 밖 거리를 왔다 갔다 한다. 동네 할머니들이 바람 쐬러 나와 그늘에 의자를 놓고 앉아 그 여자를 바라본다. 여자는 집에 들어와 세간살이를 열심히 정리한다. 학교에서 들어온 그녀의 여고생 딸은 엄마가 할머니의 유품을 버린다고 타박한다. 모녀는 치열하게 싸운다. 딸은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여자는 혼자 밥을 먹는다. 여자는 딸의 방문을 열었다가 다시 호되게 싸운다. 여자는 딸이 좋아하는 할머니 목소리의 환청을 듣는 것 같기도 하다. 다음날 여자는 다시 자신만의 일상을 시작한다. 물건을 버리러 밖에 나온 그 여자를 바람 쐬러 나온 동네 할머니들이 지켜보고 있다.
정은욱의 <틈>은 공포 스릴러 못지않은 긴장감으로 한 여자의 일상을 조명한다. 굳이 설명하자면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현재의 어떤 삶의 주름을 포착하는 것인데 그 솜씨가 예리하다. 반복되는 일상의 절차에서 차이를 만들고 그 차이를 통해 과거에 포박당한 현재의 삶의 무의미한 긴장을 인상 깊게 포착한다. 무심해보이면서도 상처를 약간의 광기로 감춘 여주인공의 내적 긴장이 특히 압도적으로 느껴진다. [김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