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인디오에 관한 짧은 필름>은 라야 마틴의 첫 번째 장편영화로, 아직 학생이었던 20세의 어린 나이에 만든 영화이다. 이 영화는 뭔가 불안한 분위기가 감도는 밤에 시작된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어둠속에 나란히 누워있고, 그들은 시대를 가늠할 수 없는 옷을 입고 있다. 그들이 누워있는 방에 조명이라고는 오직 깜빡이는 촛불 하나뿐인데, 감독은 노출이부족한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디지털 비디오 카메라를 사용했다. 그들이 있는 장소는 나무에 가려 그곳이 전통 가옥인지 아닌지도 구분할 수 없다. 여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몸을 뒤척 거리다가남 자를 깨워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남자가 해주는 이야기는 잠자리에서 듣기에는 맞지 않다. 질병과 죽음, 국가와 타락에 관한 것으로, 한 마디 한 마디에 은유로 가득한 매우 진지한 내용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내용 만큼이나 이야기를 들려주는 남자의 목소리에도 진지함이 깊이 배어난다. 남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따라 여러 개의 흑백 이미지들이소리 없이 연이어 나타난다. 그리고 이는 그들이 누워있는 모습을 그림 같은 장면으로 만들며 더욱 진지한 분위기로 자아낸다. 종치는 소년은 벽 앞에 홀로 앉아 자신의 실수에 대한 벌을 받으려고 준비하고 있다. 젊은 혁명당원은 자신의 첫 전투를 위해 숲으로 돌진하지만 그곳에는 텅 빈 전장만이 남아있다. 빛이 희미해지고 젊은 혁명당원이 체념하여 고개를 떨구는 순간 그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유머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한다. 그러한 유머는 월식이 시작되자 눈을 크게 뜨고 멍하니 입을 벌리고 바라보는 아이들과, 늙은 남자가 조각상이 되리라고 믿는 교회의 두 여성의 모습으로 보여준다. 그의 영화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듯이 라야 마틴은 영화 속에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대부분의 감독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상상하고 표현한다. 그가 상상하는 것은 그가 속해있지 않았던 과거이며 역사책들에 기록되지 않은 사건들이다. 그것들은 지금 현재를 근거로 그랬을지도 모르는 꿈들인 것이다.